두메산골 외딴집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의협심 강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살았고 그의 소년 시절 호롱불이라는 별명은 늘쌍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공부는 썩 잘하지 못했지만, 의협심이 대단한 바른생활 소년으로 학교나 집에서도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는 착한 아이였지만 그가 18살이 됐을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아버지가 눈을 감는 바람에 그는 합격해놓은 공고로 입학도 못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은 갚아야 할 쌀 80가마의 빚더미..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빚을 내어 경운기 한 대를 사고, 논을 빌려 농사지어 열심히 빚을 갚았습니다.
그러기를 4년! 아버지가 남겨준 빚은 한 톨도 남김없이 모두 그의 혼자 힘으로 청산하게 됩니다.
그 다음해에는 남의집살이를 마감하고 어머니 명의로 된 시골집 한 채를 장만한 그는 친구들보다 1년 늦게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그마저도 일을 해야했기에 한 달에 두 번 학교에 나가는게 고작.. 나머지 시간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독학한 그는 방통고 5회 졸업생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군대를 다녀온 그의 사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무일푼인 그는 친척집 등에 얹혀살며 직장을 다녔고 눈칫밥을 먹기 싫어 결혼을 결심한 그는 1988년 중매로 만난 여성과 백년가약을 맺고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당시 전 재산 800만 원을 털어 600만 원으로 단칸방을 얻고, 200만 원으로 결혼식을 올린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이 자신과 같은 불우한 청소년기를 살지 않도록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11년은 직장생활, 5년은 개인택시, 2년은 분식집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2000년부터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던 그는 19년간의 서울생활을 접고 2004년 고향 익산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조카가 하던 마트를 인수하면서 고향에서의 새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08년, 고향마을에 위치한 아파트 1개 동을 담당하는 통장이 되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마트를 운영하는 그가 기부천사로 불리게 된 것은 익산시가 매월 20만 원씩 지급하는 통장수당을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전액을 시민들을 위해 기부했기 때문입니다.

집을 사고 마트를 인수하느라 은행대출을 받아 한 푼이 아쉬운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그는 “나도 가난하지만,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많다”며 흔쾌히 이웃을 위해 통장이 받게 되는 수당 전액을 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12년간 기부한 통장수당은 모두 합쳐 2,640만 원, 웬만한 승용차 한 대 값 정도 되는 거액입니다.
그는 “수당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말한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오롯이 지켜온 것입니다.
자신이 살던 소외된 지역 주민들을 편리를 위해 도시가스 개통을 이뤄낸 사실을 생애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꼽는 그는 갑자기 자신의 마지막 통장수당을 기부하러 왔다며 익산시청을 찾았습니다.

최근 췌장암(4기)이 발병한데다 간으로 전이되면서 다발성 간암까지 생겨 더 이상 통장직을 이어갈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후회 없지만, 가족에게 항상 미안… 사랑한다”
“할 일만 묵묵히 바라보며 단 한 번도 어긋난 길을 간 적이 없다”고 자신하면서 그래서 지나온 삶은 후회가 없다는 말을 남긴 그를 배웅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눈시울은 빨갛게 붉어져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