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종 교수는 대한민국 의사로서 대중들에게 큰 귀감이 된 분입니다.
그는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도 어떻게든 환자를 살리고자 고군분투 하는 이 시대의 참 의사라고 평가받고 있는데요.
이국종 교수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됐던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총알을 6발이나 맞은 석해균 선장을 수술할 무렵부터인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국종 교수는 석선장의 몸에서 이미 괴사가 일어나 벽돌처럼 딱딱해지고 몸이 부푼 상황이었고 장기 파열이 일어나서 지혈도 안 되고 수혈도 어려워 무조건 한국에서 수술을 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5억원에 가까운 이송비를 두고 국내 정부측과 연락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 안타까워 했는데요.
비용을 본인이 감당할테니 일단 이송부터 하자고 석선장의 수술을 추진했고 무사히 한국에 도착해서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던 일화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이국종 교수는 외과의사 생활을 하는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로 일을 하다보니 정작 본인의 몸은 어느곳하나 성한 데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고 현장에 나갔다가 어깨가 부러지고 헬기에서 급하게 내리다가 무릎을 다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사를 다투는 응급환자를 한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데요.
그는 어떻게 이런 의사가 되었을까요?
어린 이국종의 집안은 무척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장애 2급의 유공자셨는데요.
6.25에 참전했다가 지뢰를 밟아 눈과 팔다리에 부상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이 교수는 중학교 때까지 학교에 국가유공자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병신의 자식이라고 놀림 당할까봐 두려웠다고 합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동사무소에서 참전용사에게 지급하는 밀가루를 머리에 이고 오다가 그만 쏟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다니다 발을 헛디디고 만 것이었죠.
땀을 뻘뻘 흘리며 어머니와 함께 밀가루를 주워 담던 이 교수는 울컥함이 솟구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세상이 장애인들에게 너무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이처럼 비정한 세상에 실망하던 그를 바꿔준 한명의 의인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 시절 축농증을 심하게 앓던 이교수는 국가 유공자 가족에게 주어지던 의료복지카드를 들고 병원에 갔다가 수없이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학산 이라는 이름의 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어린 이국종이 내민 의료복지 카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그리고 치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준 후 이 교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럼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이 말 한마디가 어린 이국종의 마음에 깊이 남게되었고 그는 다짐했다고 합니다.
의사가 되어 아픈사람들을 돕자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자고..
그리고 그는 그로부터 30년 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의사가 되었습니다.